운수 좋은 날? (이태원 '이스트 빌리지') 식당

한식이란 이름 내걸고 파는 음식 중 딱히 조리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고급화된 곳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나 싶다. 비싼 한식당이라고 하면 그저 비싼 재료를 별 감흥 없는 방식으로 조리하는 곳들이 주를 이룬다. 고깃집이나 횟집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태원의 '이스트 빌리지'란 곳이 한식이란 이름을 내걸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곳이라기에 궁금했는데, 얼마전 저녁에 방문해보았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마침 그 날이 개업 1주년이라고 하여 전통주와 그에 맞춰서 제공되는 간단한 한 입 분량의 요리를 전식삼아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운수 좋은 날도 있구나 싶다.

전통주는 협찬을 받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름이 익숙해서 뭔가 했더니 국순당에서 복원한 전통주들이다. 이화주, 석탄향, 자주, 송절주까지 모두 합쳐 4종의 술이 한 잔 씩 나왔는데, 석탄향을 제외하면 먹어봤던 술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굉장히 반갑다. 국순당이 '법고창신'이라는 브랜드로 이런 전통주들을 만들고, 판매한지는 벌써 꽤 되었는데, 사실 이 술들 시중에서 참 찾아보기 힘들다. 몇 안되는 백세주마을, 우리술상 등 국순당의 매장에서 구입하거나, 백화점의 선물세트 정도로나 구할 수 있을 따름. 가격이 약간 부담스럽긴 하지만, 얼토당토 않은 수준의 포도주나 일본주들조차 이를 훌쩍 넘는 가격을 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합리적인 가격이다. 참고로 내 기억엔 처음 국순당이 이화주 등을 복원하기 시작했을 때는 한 병에 7000원만 받고 판매하기도 했다. 그 정도면 팔려도 손해였을 성 싶은데. 하지만 그렇게 제살 깎아먹는 짓을 해도 판매량은 극히 저조했다고 하니.. 답이 없다.

계속해서 곁가지로 나가는 이야기인데, 이 곳도 일단 한식을 내세우는 곳임에도 주류 중 한국의 특색있는 술은 죽력고와 솔송주 정도가 전부다. 나중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보게 된 이 식당 주인의 블로그를 보니, 이전엔 여러 종의 전통주가 더 있었지만, 워낙 팔리질 않아 결국 판매를 중단했단 이야기가 있더라. 참고로 위에 언급한 죽력고니 하는 것들과 묶은 세트도 있던데, 과연 판매량이 얼마나 될런지.. 그날 식당 광경을 떠올려보면 술 시키는 사람도 대부분은 포도주를 주문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끔은 좀 다른 시도들도 해보시면 안되나?

어쨋건 본론으로 돌아가면, 술과 함께 제공된 간단한 요리들(이화주-육포, 송절주-생선회, 자주-육회, 석탄향-복숭아)도 차조기잎이나 마 등으로 각각의 요리마다 개성을 부여한 것이 그냥 대충 나온 느낌이 아니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석탄향과 곁들여 먹은 복숭아였다. 과일향과 단 맛이 강한 석탄향과 복숭아를 먹으니 둘이 상승 효과를 내는 느낌이었는데, 그러면서도 복숭아 위에 뿌려놓은 소금이 자칫 단조로워지기 쉬운 맛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4종의 술을 다 마셨을 때 쯤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간장 소고기 육회(17600원)였는데, 육회 자체는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맛은 아니었다. 물론 소고기의 질은 좋았고, 양념도 너무 강하지 않게 잘 무치긴 했지만, 너무 차게 나와서 맛을 온전히 느끼기 힘들었고, 아랫부분의 경우 버석거릴 정도로 얼어있었단 점은 문제다. 하지만 함께 제공되는 앙디브(보통 떠올리는 앙디브가 아니고, 보통 Belgium Endive 라고 부르는 놈인데, 치콘이라고 하면 좀 더 정확히 찾을 수 있다.)와 고수와 육회가 굉장히 잘 어울려서 그런 아쉬움을 상쇄해주었다. 고수야 그렇다쳐도, 아직 자주 접하긴 어려운 서양의 식재료인 앙디브가 함께 나온 것이 재미있었는데, 따지고보면 앙디브는 아삭아삭하면서도 약간 쓴 맛이 나고, 중국 숟가락처럼 생겻서 쌈 만들기 좋은 형태니 이런 식으로 먹기엔 딱이란 생각이 든다.(실제로 이 놈으로 김치를 만들었단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단새우 튀김(24200원). 원래는 그냥 새우 튀김을 시키려 했는데, 서빙하는 분의 권유를 받아 단새우 튀김으로 변경했다.(참고로 단새우를 그냥 회로 주문하면 8마리가 제공되고, 튀김으로 먹으면 한 마리가 줄어 7마리만 나온다.) 나온 튀김은 생각보다도 훨씬 크기가 커서 내심 깜짝 놀랐는데, 역시나 그냥 튀김옷이 두꺼운 것이었다.. 맛은 뭐.. 튀김 자체도 썩 훌륭하진 않았지만, 그보단 튀김옷 때문에 단새우의 섬세한 단 맛이 거의 가려져서 그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였고, 솔직히 말하면 맛이 없었다. 물론 평범한 새우 튀김보다 맛있긴 했지만, 단새우는 역시 그냥 회로 먹는 것이 훨씬 낫겠다. 아, 참고로 단새우 튀김에도 다른 새우튀김처럼 잣크림 폼이 함께 제공되었는데, 튀김과 합치면 이 한 접시의 칼로리가 얼마나 될까 그 점이 조금 우려된다 -_-;;

마지막으로는 돌솥밥(13200원)이 나왔다. 고사리를 비롯한 나물들 잘게 썰어서 볶은 후, 들기름과 함께 밥에 비벼서 앙증맞은 크기의 돌솥에 담아 내오는데, 들기름의 향이 그렇게 강하지 않으면서도 기분 좋은 정도로 나는 것이 맘에 들었다. 들기름, 참기름.. 이거 한식에서 빼놓기 힘든 재료지만, 가끔은 너무 심하다 싶은 정도로 사용되는 때가 많고, 향을 강하게 하겠답시고 거의 탄맛이 날 정도로 볶아 불쾌한 때도 많다. 하지만 여기 돌솥밥은 일단 들기름도 좋은 것을 쓰는 것 같고, 넣는 양도 그 적정선을 잡는데 성공한 것 같다.

이렇게 나온 요리들은 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꽤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그게 터무니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좋은 재료를 쓰고, 신경 써서 조리하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야 감수해야할 일이니까. 나온 음식들은 단새우 튀김을 빼곤 맛있었고, 가게도 나름의 컨셉을 잡고 공 들여 운영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식사를 위해 방문한다면 생각보다도 높은 가격대 때문에 크게 만족하긴 어려울 것 같다. 주머니 넉넉한 날 이태원에서 분위기 잡고 술 먹고 싶을 때 갈만한 곳 아닐까. 본래 가게를 운영자의 의도도 그런 쪽일테고. 주변의 이자까야니,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니 하는 곳들보다는 훨씬 실속있게 돈을 쓸 수 있는 곳이다. 그건 확실하다.


여담? - 원래 한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같이 적으려고 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그냥 관뒀다. 이 가게와 굳이 엮일 내용도 아니기도 하고.



덧글

  • 푸른별출장자 2012/08/08 21:32 # 답글

    단새우 는 자체가 가진 맛이 너무 강하게 달아서 요리로 하기가 참 까다로운 종류입니다.

    회가 제일 좋을 듯하고 조금 사치를 부리자면 가볍게 굽기 정도...

    가장 어처구니 없던 것은 깨끗한 맛의 중국 백주 계통이 아니라 술 자체에 향이 많은 종류에다가 단새우를 담궈서 취하(醉鰕)를 만든 것이었지요.

    단 맛과 술맛이 와장창 충돌해서 무엇을 먹는지 모르겠던 추억이 있습니다.
  • Blackmailer 2012/08/09 23:53 #

    단새우를 튀기면 맛이 어떨지 궁금해서 시킨 것이기도 한데, 결과가 그리 좋진 않았죠. 그 취하도 어떤 맛일지 궁금하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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