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참 낯선 현상. 잡담

지난 3월 3일 끝을 고한 더민주당과 정의당의 필리버스터 자체가 아니라, 그 속기록을 편집 없이 그대로 출판한 '필리버스터'라는 제목의 책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민주주의, 역사, 인권, 자유'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데, 3월 16일을 출간 예정일로 두고 이번 주 초부터인가 예약 판매가 시작되었다. 보통 예약 판매는 확실한 팬층을 거느린 작가의 작품이 아니고서야 크게 먹히지 않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이미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종합 2위에 올라섰을 정도로 엄청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책이 많이 팔리니 좋은 일 아니냐고? 글쎄. 나에겐 이게 책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인다. 정확히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책'의 보편적인 정의에 해당하는 것들의 종말이다. 지금 알라딘 베스트셀러 순위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책을 보자. 1위는 윤동주의 시집 초판본이다. 2위는 필리버스터 속기록이다.(팔려나가는 속도를 볼 때, 조만간 순위는 역전되리라 본다.) 이 두 책은 주제도, 성격도 완전히 다르지만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본문 전부를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윤동주의 시는 검색만 하면 여기저기서 다 주루룩 나오고, 필리버스터 속기록도 국회회의록 사이트에 들어가서 한글 파일로 바로 다운받을 수 있다.(http://likms.assembly.go.kr/record/) 그 내용이 궁금하면 얼마든지 공짜로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윤동주 시집 초판본은 그 물성에서 특징을 찾을 수는 있겠다. 이런저런 끼워주는 상품들도 나름 알찬 모양이고. 그런데 필리버스터 속기록? 14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그것도 정제된 글이나 언변이 아니라 시간을 길게 끌기 위한 장광설을 그대로 받아 적어 편집도 없이 그대로 인쇄한 것을 책으로서 읽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할 사람은 구매자의 1%도 안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책을 사기만 하고 제대로 읽지는 않는 사람들은 옛날부터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조롱하는 농담도 금방 몇 개고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주객이 전도된 때는 없었다. 스마트폰만 켜면 바로 온갖 정보와 읽을 거리가 넘쳐나고, 글 말고도 영화나 TV 등 다른 오락거리가 수없이 쏟아져나오는 지금, 책의 가치는 이제 그 안에 담긴 글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쏠리고 있다. 이 책을 가지고 있다는 만족감, 책의 디자인, 물성 등.

출판사들의 움직임 또한 이전과는 너무나 달라졌다. 속기록이 공개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필리버스터'의 예약 판매가 걸렸는데, 일반적인 책의 출판 과정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다. 예약 판매를 시작한 시점에선 인쇄는 물론 디자인조차도 끝나지 않았었으리라 확신한다. 3년 전에 출간된 '안철수의 생각' 같은 경우 원고를 넘겨받고 불과 사나흘 만에 교정을 끝내고 인쇄에 들어갔다고 해서 화제였었는데, 이 책은 아예 교정을 보지 않아도 된다.

교정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건 곧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는 말. 게다가 현행 저작권법에 따르면 공공기록물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인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책의 가격은 33,000원. 꽤나 남는 장사다. 누가 이 책을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머리를 잘 굴렸다. 한몫 단단히 쥘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출판 관계자들, 독자들이 회의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옳고 그르다,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덧글

  • 유빛 2016/03/11 12:08 # 삭제 답글

    그렇군요. 윤동주 시집이 팔리는 걸 보고 저게 왜 팔리는걸까? 책과 문학의 부활인가?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볼 수 있는거로군요.
  • dsfgsdfgsd 2016/03/11 14:32 # 삭제 답글

    윗분도 글쓴 분도 간과한 게 있으시네요. 요즘 한창 영화 '동주'가 인기 있기 때문에 장식용으로 사려는 사람이 많아진 겁니다.
  • 유빛 2016/03/11 16:27 # 삭제

    그건 저도 생각은 했습니다만, 영화 때문에 (안 볼) 책까지 살까? 해서요. 그런데 글쓴분 말씀을 고려하면 그냥 기념품 내지는 장식품으로 책을 사나보군요
  • Blackmailer 2016/03/12 00:02 #

    아뇨. 윤동주 시집 초판본은 영화가 개봉하기 두어달 전부터 베스트셀러였는데요.
  • 2016/03/12 00: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6/03/12 08:45 # 답글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하겠어요. 저는 아직도 이북이라는 체제에 대해 친숙하지 않아요. 심지어 논문을 읽을 때도 중요한 논문들은 꼭 프린트해서 줄쳐가며 읽게되고요. 저 같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고.... 윤동주 시집이 영화와 관련없는 건 아닐거에요. 다만 인터넷 찾으면 다 나오는 그 시들을 굳이 책으로 다시 읽고 싶은 것은 그 두터운 책장을 넘기면서 읽는 그 경험이 포함되어야 독서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북이 훨씬 친숙한 세대들은 다르겠지만... 전 아무리 이북이 편하고 다운로드 받기 쉬워도 도서관 가서 책 빌려볼래요! 필리버스터도 눈아프게 계속 인터넷 들여다보면서 보기보다 책으로 보는게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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